MMA(이종격투기), 두선수가 엉켜있는 모습

MMA(종합격투기)의 탄생 (5편)

 

한국에서 MMA가 정착하기 위한 과제

 

한국에서 MMA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난제가 많다. 첫 번째는 우수한 선수들의 확보이며, 두 번째는 격투기를 폭력적이라며 도외시하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설득이다.

자질 있는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투기종목의 아마추어 학원스포츠계는 MMA 시장에 자신의 선수들이 나가는 것을 금기시한다.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면 교수자리가 보장되는 상황에서 선수들 자신도 위험을 무릅쓰고 장래가 불확실한 대회에 나갈 리는 만무하다. 또 프로선수로 생활하기에 한국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하다. 대학의 무술관련학과를 졸업하고 체육관을 차린다면 충분한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벌이는 가능하다. 경희대, 용인대, 한체대는 이미 무술브랜드화 되어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프라이드에 나가 화제가 된 요시다 히데히코는 일본에서도 예외적인 경우이다. 요시다는 아마추어 시절이 경제적으로 더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요시다급의 선수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메이지 대학 유도부 감독이었으며 신일본제철소속 선수였던 그는 아이러니하게 경제적으로는 안좋아졌지만 시합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아마추어 경기는 한 번 지면 모든 것이 끝이며 항상 결과가 모든 것을 좌우하지만 프로에서는 경기에 져도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관객들이 경기를 원하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요시다는 1969년, 힉슨그레이시는 1959년생, 다카다 노부히코는 1962년생, 마크 콜먼은 1962년생, 사쿠라바는 1969년생, 이노우에 엔센은 1967년생, 후지타 카즈유키는 1970년생, 사다케 마사아키는 1965년생, 미르코 크로캅은 1974년생, 돈 프라이는 1965년생, 밥샵은 1974년생, 효도르는 1976년생.

이처럼 프라이드 간판선수들은 평균 나이가 30살을 훌쩍 뛰어넘는다.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연령이 점점 내려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MMA는 아마추어 경력이 다 끝난 선수들이 참여하는 경기라는 인식이 있다. 물론 위의 선수들은 이전에도 프로경기에 나오던 선수들이며 MMA가 프로레슬링을 효과적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선수수급에 공백이 생겼기 때문에 아마추어 선수들이 프로경기에 나오게 됐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20대가 지나면 퇴물취급을 받는 한국의 스포츠계에서 30살이 넘어서 프로선수로 활동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 분명하다. 또한 경제적인 이유나 가족들의 반대도 아마추어 선수들이 프로경기에 출장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내 격투경기에서 무엇보다 심각한 장애물은 격투기에 대한사회의 시선이다. 유도태권도 같은 엘리트 무술선수들에 대한 시각도공정치 못한 한국 사회에서 MMA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어중간한 단계에 머물고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에 서있는 이종격투 선수들은 일부 선수들은 그런 의견이 불공평하다는 의견도 많지만 기량면에서 복싱 챔피언이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종격투기계에도 실력 있는 강자들이 모일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자본의 향방과 대중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성공한 대회들조차 처음에는 소박하게 시작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한국의 MMA 기획자들은 그 대회들의 화려한 성공 신화만을 지나치게 흉내 내려 하고 있다.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열기가 끝난 1980년대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수많은 대회가 열렸으며 관객들의 지속적인 호응을 얻었다. K-1과 프라이드라는 메이저 대회는 이런 수많은 군소대회와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경기이며 어느 날 갑자기 인기를 얻은 대회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문무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무사를 숭상하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무술가들을 대접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뿐만이 아닌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다.

K-1 대회를 여러 번 제패한 어네스트 후스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네덜란드에서는 킥복싱을 스포츠로 보지 않아요. 킥복싱은 드센 사람들만 하는 거친 경기라고 보거든요. 전에는 아무도 나에 대해 몰랐고자신이 킥복서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풍조마저 있었어요. 하지만 일본에서는 킥복서를 존경하고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한 파이트머니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프로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면서 후스트는 일본에서 자신이 수만 명의 관객 앞에서 시합을 한다고 말해도 고국인 네덜란드에서는 별로 믿어주지 않는 눈치라고 귀띔한다.

세계 격투가들의 꿈은 일본 무대에 서는 것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무사를 존경하는 풍토가 있으며 프로무술가가 되어서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현재 프라이드의 간판선수인 노게이라도 4년 전에는 일본에서 격투가로 성공하는 것이 꿈인 청년 중 한 명이었다. 2001년 K-1 월드그랑프리에서 우승하여 상금을 무려 4억 8천만원을 받은 마크 헌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경기를 했을 때 겨우 20만원에 불과한 파이트머니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격투기를 격렬한 펀치 러쉬로 생각하여 MMA 경기에서조차 발차기와 유술기를 뺀 펀치를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링에서 멋있는 상단차기나 암바 기술이 나올 때마다 환성을 지르는 일본인 관객의 수준과는 자못 차이가 난다.

이런 것은 바로 입장요금과 직결이 된다. 2002년에 열린 K-1 파리 대회의 링사이드 요금은 12만원이었으나 대단히 비싸다는 것이 현지의 평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K-1이나 프라이드 대회의 링사이드에 앉으려면 최소한 30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가격이 비싼 링사이드 티켓이 일본에서는 먼저 팔린다.

일본에서는 승자 못지않게 패한 선수에게도 따뜻한 격려가 주어지며 잘 싸웠다는 함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다. 제롬 레 베너는 이런 풍경이 낯설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져도 관객들이 응원을 해줘서 그 응원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국 프랑스에서는 한 번 지면 모든 게 끝이죠.”

 

한국에서 MMA 대회가 ‘왜’ 정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도 대회의 성공을 위한 자극이 될 수 있다. 선진국이 되려면 사회의 다양한 가치기준이 있어야 한다지만 MMA 대회는 외국의 하위문화가 수입된 것은 아닌지, 경기에 참여하는 젊은 선수들이 땀을 흘려 미래를 걸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무도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같은 MMA 기획자들의 열정이라도 돈에 대한 열정과 무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에 대회주체들은 끊임없이 분열하고 재탄생한다. 벌써 10여 종의 MMA 대회들이 한국에서 열렸거나 기획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MMA는 프로레슬링, 복싱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새로운 형태의 격투스포츠이다. 한국은 내수인구가 적어 시장성이 없으며 대회 때마다 나타나는 3천 명 안팎의 유료관중으로는 현재의 대회규모조차 유지하기 힘들다는 평가도 있지만 MMA의 열기를 그대로 사장시키기에는 아깝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MMA 대회의 정착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식견을 가진 기획자들이 많이 나와야 하며 전문트레이너의 등장이 필요하다. 대회가 열리면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나와 상대선수들을 향해 “죽어 버려!”라고 외치는 세컨드는 적어도 전문트레이너의 자격이 없다.

또 잔인한 경기라고 비난해 마지않을 언론사들을 잠재울 유능한 홍보담당자도 있어야 한다. 매스컴과 수많은 사람들이 MMA가 위험한 경기라는 지적을 한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위험하지만 패러글라이딩이나 스키를 타는 것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다.

 

목욕탕과 격투대회가 로마시대 말기의 병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사가(史家)들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찜질방이 불가마로 업그레이드되어 점점 성행하고 여배우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는다. MMA 대회가 인기를 얻을 수록 자신의 출발점이 ‘무도’ 였다는 점을 잊지 않고 무술의 본래 정신인 자기 수행과 즐거움, 절제를 다시 한번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스포츠중계

 

참조: MMA(종합격투기)의 탄생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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