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프로레슬링 선수 홍보 포스터 모습

UWF의 잘못끼워진 첫단추

 

잘못 끼워진 첫단추

 

1984년 3월 8일, 세계종합격투기계(특히 일본의 격투기계)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인 유니버셜 프로레슬링연맹(UWF)의 사무소가 드디어 문을 열게 되었다. 4월1일에는 니이마가 유니버셜 프로레슬링의 발족기자회견을 했고, 4월 11일에는 사이타마 오오미야 스케이트 센터에서 UWF의 첫 경기를 개최했다. 그러나 사무소가 문을 열던 3월 8일 바로 그날, 강력한 스폰서가 돼줄 것으로 믿고 있던 후지TV가 ‘UWF의 경기중계를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당시의 슈퍼스타인 이노끼와 타이거마스크가 참가하지 않는 경기를 중계하는 것은 방송국으로서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캐릭터 상품이나 비디오, DVD 등의 부가적인 수입원이 전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방송국에서 중계를 해주지 않는다면 중계료가 들어오지 않는 것은 물론 선수들의 인기도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새로운 단체는 발족도 제대로 하기 전에 높고 험한 장벽에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UWF 멤버들은 직원이나 선수를 불문하고 과거의 둥지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일단 UWF를 애초의 구상대로 밀고 나가려 했다. 그들이 그렇게 고집을 부린 이면에는 당시 UWF에 모인 멤버들이 신일본프로레스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숨어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노끼는 UWF를 여차하면 옮겨 갈 수 있는 자신의 새로운 회사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신일본프로레스의 엘리트가 UWF 쪽으로 많이 옮겨가 있었다. 그런데 스폰서가 붙지 않는다고 해서 금방 개업했던 가게를 닫고 원래의 회사로 돌아가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우리가 남아있던 멍청한 녀석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남자다운 허영심이 그들을 외길로 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허영심이나 부풀려진 자부심만으로는 고픈 배를 채울 수 없었다. TV가 중계를 해주지 않는 이상 안정적인 수입은 기대할 수 없었고 경영은 점점 힘들어졌다. 1987년에 신일본프로레스와 제휴(사실상의 흡수합병)를 맺을 때까지 경영상태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종국에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당시의 피라미드회사인 토요다 상사를 스폰서로 잡기에 이르렀다. 비록 수상쩍은 돈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가 UWF의 짧은 역사 속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탁월한 실력의 선수와 뛰어난 스태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어서 제대로 흥행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요즘이라면 인터넷을 통해 팬클럽이라도 조직해서 자금을 모으련만 당시로서는 그런 수단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선수들을 하나로 모은 것은 사야마 사토루의 슈팅구상이었다. 사야마의 구상은 UWF를 기존의 프로레슬링과 차별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별 룰의 설정, 관절기와 킥을 중심으로 하는 시합전개는 점차 많은 팬을 확보하게 되었다.

과거의 프로레슬링처럼 화려하고 큰 기술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링 위에 착 달라붙은 두명의 선수가 집요하게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고 관절을 공격해 들어가는 모습을 좋아하는 팬들이 점차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기내용은 몇 초만에 한번씩 큰 기술이 터지고 유혈이 낭자한 기존의 프로레슬링 팬의 눈에는 낯선 것이었고 무엇보다 방송으로 내보내기에는 화면의 움직임이 너무 적었다. 거기에 사장이었던 우라타 노보루가 사야마 사토루의 이적을 둘러싸고 발생한 계약트러블 때문에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결정적으로 UWF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1년 반의 짧은 수명을 다하고 UWF는 문을 닫고 말았다.

프로레슬링계는 유난히 단체의 이합집산이 많은 곳이다. UWF도 그런 세력재편성의 과정에서 등장했다 사라져 간 단체의 하나이지만, 다른 단체의 발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당시의 프로레슬링이라는 토양에 만족하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격투기를 시도해보고자 하는 의욕에 찬 젊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TV 방송국과 안토니오 이노끼 사이의 권력다툼과 권모술수의 부산물로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실전’이라는 컨셉을 링으로 끌어들이고, 본격적으로 관절기를 도입했다. 지금의 종합격투기로 이어지는 토양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카다 노부히코는 “뭔가 프로레슬링과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한다는 인식은 있었다. 그러나 매스컴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것이 프로레슬링이다.’ 라고 한껏 목에 힘을 주고 주장했었다. 프로레슬링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프로레슬링이라고 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론 그로서도 종합격투기라는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는 겨우 발끝만 들여놓은 정도에 불과했다. 룰이나 시합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또 그 실험에서 얻은 것을 경기에 피드백시키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참조 : 신 UWF의 등장과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