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본프로레스로의 회귀
세계종합격투기계(특히 일본의 격투기계)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인 혁명적인 반란을 꿈꾸었던 UWF는 경영활동부진으로 인해 결국 문을 닫게 되고 참가했던 선수들은 각자 다른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선수는 떠나왔던 과거의 집(신일본프로레스)으로 복귀했지만 사야마 사토루는 자신만의 슈토 구상을 품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신일본프로레스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외형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유니버셜이라는 단체 소속으로 되어 있었고 UWF VS 신일본프로레스의 형식으로 대항전이 벌어지는 등 UWF에 진출했던 선수들과 신일본프로레스에 남아있던 선수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결정적으로 이들의 사이가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87년에 발생한 마에다 아키라의 쵸슈리키 안면직격사건이다. 1987년 11월 19일, 고라쿠엔 홀에서 벌어졌던 경기에서 6인 태그를 이루어 쵸슈리키와 대전했던 마에다가 등 뒤에서 쵸슈리키의 안면을 걷어찼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마에다 아키라는 신일본프로레스에서 해고당하게 된다. 그리고 마에다 아키라의 해고는 단순히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UWF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이후 UWF에 참가했던 레슬러와 신일본프로레스에 잔류했던 레슬러 사이에 있던 벽을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고 말았다. 마에다가 해고당한 뒤의 신일본 프로레스의 분위기에 대해서 다카다 노부히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에다씨가 해고된 뒤에,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겨울의 꽤 추운 시즌이었다. 아마 마에다씨가 빠졌던 ’87년의 후반기라고 생각된다. 겨울이라서 선수대기실이 꽤 추웠다. 그리고 거기에 스토브가 달랑 1개인가 2개 놓여 있었지. 그 스토브 주위를 베테랑 선수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고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테랑과 젊은 선수들은 각각 대기실이 달랐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이단체는 젊은 선수를 키워준다거나 스타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구나.’ 하는 것이었다. 계속 여기 있다가는 앞으로 20년은 걸려야 저 스토브 근처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
당시 그가 본 것은 신일본프로레스라는 단체의 부동의 서열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력과는 상관없이 입문서열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구체제는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 선수들에게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의 레슬링, 자신들이 원하는 실력위주의 새로운 단체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게 되지만, 이미 한번의 실패를 통해서 열정이나 의욕만으로는 아무런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한 터였다. 젊은 선수들만으로 구성된 단체에는 TV중계는 물론 제대로 스폰서도 붙지 않았다. 흥행조차 제대로 이루어질지 어떨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87년의 겨울 내내 젊은 선수들은 갈등하고 술을 마시면서 격론을 토로하고 술이 깨면 현실에 절망하는 나날을 되풀이하게 되었다.
이런 악순환을 깨게 된 것은 선수들간에 ‘우리의 이상향을 만들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1년만이라도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라는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복권이라도 사는 심정으로 젊은 선수들은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것이 제2차 UWF의 등장이다. 해외스포츠중계
신 UWF의 등장과 분열
신UWF는 1988년 4월에 결성되어 1991년 1월에 해산되기까지 2년 9개월간 존재했다. 1988년 4월 8일, 마에다 아키라, 다카다 노부히코, 야마자키 카즈오가 주축이 되어 신생 UWF를 설립했다. 이어서 5월 12일에는 도쿄의 고라쿠엔 홀에서 신생 UWF의 첫 경기가 벌어졌다. 이 경기는 예매 10분 만에 모든 표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1989년 4월 14일에는 후지와라 요시아키, 후나키 마사카츠, 스즈키미노루가 신일본프로레스에서 신UWF로 이적해 왔다. 11월 29일에는 동경 돔에서 U-COSMOS를 개최해서 관객 6만 명을 동원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경기가 신 UWF의 절정기였다.
신UWF가 표방하고 있던 여러 가지 요소, 즉 로프에 튕겨서 상대를 공격하는 로프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장외투를 하지 않는다, 태그매치도 없거니와 반칙도 허용되지 않는다 등등. 종래의 프로레슬링에서는 허용되던 이런 요소를 극력 배제한 결과 ‘격투프로레슬링’ 혹은 ‘슈팅’이라고 불리는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직 슈토가 정식으로 발족되지 않았던 시기의 일이다.
그동안 침체되고 패턴화된 ‘대중오락’을 보면서 불만이 쌓여있던 팬들은 신UWF의 발족을 계기로 폭발적인 호응을 보였다. 또한 UWF도 팬들의 반응에 화답하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매니지먼트 측면에서의 새 요소를 도입했다. 그 중의 하나가 컴퓨터 티켓팅 시스템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당시는 프로레슬링의 표를 사기 위해서는 직접 해당 단체에 전화를 걸어서 예약하거나 판매구로 가서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UWF는 티켓피아(일본의 종합 티켓 판매처)를 통한 판매를 메인으로 삼았다. 기존의 화려한 티켓과 비교하면 티켓피아의 표는 소박한 것이었지만 반응은 좋았다.
또한 세 번째 시합인 아리아케 콜로시엄에서는 레이저 광선을 구사한 화려한 연출을 선보였다. 국내에서도 지난 2003년 9월에 열렸던 KOMA의 경기에서 레이저 광선 조명을 선보였지만 이미 십여 년 전에 UWF가 먼저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리아케 콜로시엄전 이후에는 3카운트 폴이라고 하는 프로레슬링의 절대적인 승리기준이 폐지되었다.
UWF는 지금 생각해 보면 각 단체의 간판급 레슬러들이 우글거리면서 시합을 벌였던, 꿈 같은 경기가 속속 벌어지던 곳이었다. 야마자키 카즈오 VS 마에다 아키라, 마에다 아키라 VS 후나키 마사카츠, 마에다 아키라 VS 스즈키 미노루, 마에다 아키라 VS 후지와라 요시아키, 후나키 마사카츠 VS 다카다 노부히코 등등. 스타들의 대결이 매 대회마다 벌어졌던 것이다.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흥행은 성공적이었다.
흥행규모도 요코하마 아리나, 그리고 동경 돔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점점 규모를 키웠다. 보러 오는 관객의 수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등 외적인 향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런 외적인 향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내부적으로는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순조롭게 흥행을 거듭하면서 영구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던 신 UWP 그러나 파국은 의외의 장소에서 찾아왔다. 이번에는 회사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던 프런트와 실제로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 사이의 틈이 벌어진 것이다.
1990년 10월에 마에다 아키라가 회사측의 독단전횡과 경리 부정을 규탄했다는 이유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리고 12월의 마츠모토 대회에서는 선수 전원이 일치단결해서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자 회사는 레슬러 전원을 사이좋게 해고시켜 버렸다. 사실상 신UWF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UWF의 종말은 조금 늦게 찾아온다.
회사 측의 독단전횡과 경리부정을 보고 자신들의 회사를 강탈당하는 것이라고 느낀 마에다는 일단 회사를 분해해서 쓸데없는 인원을 털어내고 다시 한번 단체를 설립하려고 생각했다. 그의 구상은 먼저 사무소를 얻는 것에서 시작했다. 흥행교섭도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해고된 선수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집을 지으려고 저축해 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선수들에게 매달 월급을 지불했다. 그 당시에는 모두를 먹여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를 회고하는 마에다 아키라의 말이다. 마에다는 자신을 믿고 따라왔던 선수를 먹여 살리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스폰서가 결정될 즈음 마에다는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제안은 앞으로 UWF는 선수들의 완전합의에 의해서 운영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미 구UWF와 신UWF를 통해서 선수가 아닌 프런트와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선수들 상호간의 신뢰를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단체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이때 모인 것은 선수만이 아니라 그들과 연관을 맺고 있던 선수 대리 등 외부관계자가 몇 명 섞여 있었다. 며칠 후 마에다는 자신의 집으로 선수들만을 불러 모았다.
“이중에 나를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UWF는 해산하겠다.”
마에다는 이 말을 하면서 내심으로는 모두가 따라와 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나중에 UWF 인터내셔널에 참가하는 미야토 유우코가 ‘지금 대답할 수는 없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버렸고, 결국 신UWF는 종말을 맞이했다.
참고 : 격투기의 발전사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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